다음주 금요일과 토요일, 무대 위에서 찬란한 발아신고를 할 권이은정 안무자가 고민하는,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어머니의 어머니>
권이은정 | [2019 새싹이예염!] 선정 안무자
“왜 나한테 욕을 해요? 내가 당신한테 뭘 잘못 했는데? 나도 충분히 나이 많아요. 허리 아파서 앉았는데, 왜?!” 지하철 저 끝에서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낮 시간 치고 사람이 많았지만 나도 덩달아 소리를 지르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욕 했으면 사과하세요!”
마스크를 쓴 노년 남성은 죽일 듯이 노려보며 쏘아대는 나와 분이 풀리지 않아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화를 내는 할머니를 번갈아 쳐다보며 웅얼웅얼 거리더니 “미안합니다”라고 했다. 상황은 모면해야겠으나 지기는 싫어서 얼굴을 들이밀며 “미안하다고, 됐어?”라고 덧붙였으니 물론 사과는 아니었다. 그 작자의 입은 다물어졌지만 목적지에 도착해 발걸음을 옮기는 마음은 찜찜하기만 했다. ‘지금 당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도 다 이런 어머니들 덕분인 줄 알고 감사해할 줄은 못할 망정 어디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미는가. 죄송하면 사람 불쾌하게 하지 말고 자리를 비키라’고 했어야 했는데. 종종 했던 삭발에 큰 덩치 때문이었는지 20대 때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모르는 남자에게 워낙 많이 맞아봐서, 이럴 때는 경찰이고 뭐고 무조건 같이 소리지르고 싸워야 후회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못다한 악다구니가 늘 아쉽고 분하다. 한 편으로는 놀라웠다. 급기야 지하철에서 화내는 할머니를 만나다니. 이번 작품을 구상하며 계속 떠올렸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아티스트 웨이>에서 말하는 ‘동시성의 원리’를 계속 경험했다. 시작부터 그랬다. 마음은 끌렸지만 기운이 없어 도전할 생각이 없었던 신인안무가전에 출전을 결심했을 때도, 전부터 가지고는 있었지만 펼쳐본 적은 없는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을 드디어 읽기 시작했을 때도, 우연히 보게 된 영화와 무용 공연에서도 자꾸만 언니들이 나를 이끌어주었다.
작년 봄, 아기를 낳았고 기운을 잃었다. 출산 전보다 오히려 활동이 늘었고 강의와 공연은 끝이 없는데, 내가 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무언가에 떠밀려 굴러가는 것이지 내 힘으로 진행되는 일이 아니었다.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몰랐다. 내 아기가 살기 위해서는 내 일부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고 세상 모든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들께 한없는 경외가 생겼다. ‘우리 모두는 태아였다’며 낙태 합헌을 낸 두 남성 헌법재판관의 말에는 코웃음이 났다. 어디 태아의 주체성을 운운하는가. 모체 입장에서는 한낮 이물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태아로 키운 건 당신들의 어머니이지, 당신들이 어느 날 저절로 태아가 되어 자신의 힘으로 태어난 줄 아는가. 제 똥도 제가 닦지 못하던 것을, 양육자에게 전적으로 생명을 (상상하는 것보다 아주 오래) 의존했던 존재였음을, 물론 잊은 지 오래겠지.
내면의 늑대가 살아있는 언니들이 나를 다시 살려내었듯이, 늑대를 만나는 길이 막혀 몸과 마음이 묶여있는 여성들에게 나도 그런 언니가 되고 싶은 소망을 담아 작품을 만들었다.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나를 위해 필요한 것을 남을 위해 포기하고서도 얼렁뚱땅 포장하지 않는, 기쁠 때 하하하하 웃고 즐거우면 덩실덩실 춤추고 길지 않은 삶 미련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한과 살은 확실하게 푸는, 명랑하고 당당하며 우아한 할머니를 보여주고 싶다. 살아온 삶보다 더 강력하고 힘이 되는 증거는 없으니까.
'언론 보도 + 기획 공연 인터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싹이예염! VOL.3-기획후기]: '우리는 지금 꿈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습니다'.(19.6.26.수) (0) | 2019.06.24 |
---|---|
[새싹이예염! VOL.3-새싹원고]:'극복의 기술' (19.6.24.월) (0) | 2019.06.24 |
[새싹이예염! VOL.3-새싹원고]:'공연이라는 ‘데드라인’을 ‘촉촉하게’ 준비하며'(19.6.17.월) (0) | 2019.06.24 |
[새싹이예염! VOL.3-새싹원고]:1+! -시절 그리고 오늘의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19.6.13.목) (0) | 2019.06.24 |
[새싹이예염! VOL.3-새싹원고]: 당신은 젠틀맨인가? (19.6.10.월) (0) | 2019.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