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CERS' LOUNGE-

언론 보도 + 기획 공연 인터뷰

[찬란한 벌판 - 출연진의 글 1] ‘그저 허허벌판이어도 좋은 어딘가에-' (20.8.3)

댄서스라운지 2020. 9. 2. 14:30

<그저 허허벌판이어도 좋은 어딘가에->

천 샘 | 예술가 시민

작년 여름부터 ‘아직 가닿지 못한 그곳, 찬란한 벌판’의 창•제작진은 어떤 묵직한 연대의 계절을 ‘긴밀하게, 함께’ 지나왔습니다. 한 치를 알 수 없는 긴장감 속에서 무용계 미투 사건의 법정 연대 과정을 겪어내었고, 그 과정 안에서 이른바 ‘무용계가 있다면 그 이상향은 어디인가’라는 불덩이처럼 타들어간 질문에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예술의 시작은 자신의 생각과 영감을 자유롭게 펼쳐놓음에 있을 텐데요. 무용에서 그 토대가 되는 신체주권이 쓰라리게 짓밟힌 현실을 보며, 제작진이기 전에 여성 무용수였던 저희는 너나 할 것 없이 무너졌습니다. 때문에 ‘매순간 수많은 ‘을’로서 숨죽이며 살았던 여성 무용인들의 신체주권을 회복하고 이를 가슴 벅차게 펼쳐놓을 너른 땅은 어디인가’ 라는 질문은 이번 공연을 통해 반드시 답해야할 공통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올 초 코로나의 강풍 속에서 한차례 지연된 후 이제 비로소 본 공연을 앞둔 저희는 떨리는 마음으로 6개월 만에 다시 티켓 창구를 엽니다. 그리고 이 공연을 통해 실은 그리 ‘찬란하지’ 못한, 즉 아픈 대지의 실태를 드러내는 작품들을 선보이려 합니다.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서사를 담은 작품 <단단한 고요>와 대한민국 여성들이 매순간 위협받는 일상의 현실을 그린 <전사의 땅>입니다. 공연 일주일 전, 관객 여러분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위로와 치유의 움직임 수업, [벌판을 달리는 여인들!]도 준비하고 있으니 지난 번 조기 마감되어 아쉬워하셨던 분들은 서둘러주세요.^^ 아쉽지만, 많은 땀을 흘릴 수 있는 서아프리칸 댄스는 코로나 상황을 참작하여 진행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새로운 벌판을 꿈꾸며 다시금 발을 내딛는 지금,
저희는 그저 허허벌판이어도 좋겠습니다.
조명이 없어도, 객석수가 적어도, 세트가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댄스플로어 하나 달랑 깔린 초라한 벌판일지언정, 공고한 위력의 피라미드 안에서 주변의 시선과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현실을 마주하며 싹트는 고민들을 움직임으로 펼쳐놓고 온 몸에 멍이 든다해도 데굴데굴 굴러다닐 수 있다면, 그 어떤 초라한 벌판이어도 그곳이 더 좋겠습니다. 그렇게 저와 그리고 이 공연을 만든 모두는 맨땅에서 살이 패도록 굴러다녀도 변화의 대지에 안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것 같습니다. 어떤 가식도, 위계도, 권력도 작동하지 않는 황무지 같은 너른 벌판을 품은 예술이 사무치도록 그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우리보다 앞서 걸어온 지구촌의 수많은 여성 시민들과 무용수들에게 헌정하는 이 작은 공연을 9월 4일과 5일 이틀 동안 올리려고 합니다.

아직 가닿지 못한 그곳, 당신과 나의 찬란한 벌판-을 당신과 함께 걷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