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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살롱 이브닝: '인간예찬'] 배웅과 마중이 교차하는 길목에서 - 천샘

댄서스라운지 2018. 8. 4. 16:34

오늘 아침 모든 공연이 매진되었음을 알리는 좋은 아침입니다. 하지만 마냥 좋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긴장이 되네요.^^ 건강한 긴장감, 부드러운 깨어 있음으로 마지막 남은 며칠을 준비하겠습니다. 이번 주말 댄서스라운지에서 뵙겠습니다. //살롱지기 

 


 

 

<배웅과 마중이 교차하는 길목에서>


천 샘 | 2018 살롱이브닝 안무자

 

어렸을 적, 집에는 조그만 창고 방이 있었습니다. 계단 밑의 자투리 공간에 문을 내 집안의 짐들을 넣어놓은, 그리하여 곰팡이 냄새와 된장 냄새, 그리고 낡은 가구들 냄새가 가득한 곳. 이제는 그 방의 문을 열 때 풍기던 시큼한 냄새가 곰팡이 냄새라는 걸 알지만, 그때는 그마저 알지 못할 신비로움으로 느껴져 이 냄새를 맡으며 기어이 비집고 들어가던 보물의 방이었습니다. 방 안에는 낡은 선풍기, 말아둔 장판, 장을 다 먹어 비었지만 냄새는 아직도 그득한 도기들이 구석구석 쌓여 있었습니다. 저는 물건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놀곤 했지요. 도기의 뚜껑을 열었다 닫고 작은 유리병을 이리저리 옮기다보면 오후나절은 유유히 흘렀습니다.

 

하루는 막 결혼한 막내 외삼촌과 외숙모가 인사를 오셨습니다. ‘모시메리’라 불리던 당시 핫한 내복을 입고 놀던 저는 문득 내복바람으로는 인사하기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창고 방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헌데 아뿔사! 이를 어떡하죠? 두 분은 대문에서 집 안까지 엄청나게 빨리 들어오시더니 창고 방 앞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샘아~! 인사하러 나와!” 목이 터져라 제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저는 결국 쭈뼛거리며 외삼촌 뒤에서 나왔습니다. 모시메리와 함께 구겨진 자존심을 붙들고 울기 직전의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를 읊조렸던 그날의 인사. 누군가를 만나는 가장 부끄러웠던 인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헤어지는 인사는 어땠을까요.

 

여러분은 누군가를 지극하게 배웅 나가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상대방이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 이 헤어짐이 마지막이 될지 모름을 예감하면서도 기어이 떠나는 길을 따라나서 본 경험이 있으신지요. <배웅 가는 길>이라는 제목을 붙인 제 작품은 이별을 담대히 따라나서고 헤어짐의 순간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삶의 태도, 그리고 그렇게 마지막을 지켜내는 순간들이 우리 안에 심어주는 사람에 대한 지극한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어 만든 작품입니다. 헤어짐은 더 이상 지극함을 연상시키지 않는 시대에, 돌이켜보면 누군가와 헤어지는 길을 ‘아름답게 보내드리며’, ‘네가 다치지 않게 떠나보내 줄 거야~’라는 유행가 가사가 난무하던 청소년기를 보낸 것은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까지 인사하는 것, 끝까지 손을 흔드는 것. 한 사람이 점이 될 때까지 돌아서지 않는 것. 그 미련스럽고 우직한 인사를 사람에 상관없이 늘 하는 것. 그러다보면 이별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를 너무도 거칠게 밀어내고, 폭력적으로 지워내며, 분노로 단죄하는 일상의 태도는 줄어들 것입니다.

 

사실 작품은 글과는 달라서 이렇게 쓰면서 아직까지도 저를 먹먹하게 하는, 그 지극하고 바보 같은 애련함이 작품 속에 묻어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작품은 배웅의 극진한 자세를 통해 우리들의 삶이 온전하게 사랑받았음을 기억하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 헤어짐의 시간이 다가오는 누군가들이 있다면 위로하고 싶어 만든 작품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언젠가 다가올 ‘죽음’이라는 가장 큰 이별을 앞두고 어느 순간부터 준비하시는듯한 부모님을 위로하고 싶어 만든 작품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 시간이 올 때 가장 극진한 배웅의 마음가짐으로 그분들을 떠나 보내드려야 할 우리 자신을 위해 만든 작품입니다. 설령 이 애련한 마음이 너무 구닥다리가 아닌가 싶을지라도, 먹먹한 가슴을 이렇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이제는 곁에 있어도 그리움이 짙어지기 시작한 마음은 지난날 받았던 사랑을 갚지 못해 늘 슬퍼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품은 부모님 세대가 이해하기 쉬운 가요를 썼고, 음악을 거스르는 움직임 보다는 음악을 타고 들어가는 움직임으로 깁었습니다. 때문에 즉흥적-도발적 요소를 갖춘 현대무용의 트렌드와는 거리가 있고, 굳이 장르 구분을 해야 한다면 현대무용보다는 컨템포래리입니다.

 

하지만 ‘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즉 ‘내’가 되기 위해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그것은 지금까지 나를 빚어준 모든 이들에게 마음의 빚을, 못 다한 사랑을,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한 수많은 아픔을 예술을 통해 보듬어 안는 작업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사랑하는 이들에게 다시금 용서를, 이해와 회복을, 진심 어린 감사를 구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작업입니다. 예술계 안에 살면서 가끔은 다른 작품을 보러가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하지만, 실은 그 비판만큼 제 안에 무섭게 똬리를 튼 욕심에서부터 멀어지고 싶어서, 그럴수록 나와 내 주변의 삶에 좀더 따뜻하게 집중하고 싶어서 만든 작품입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배웅 가는 길의 끝자락과 마중 가는 길의 시작에서 조우하게 될 누군가가 있다면 저는 극진한 마음과 차마 알지 못할 어떤 그리움을 안고, 제 슬픔을 배웅하고 그 길을 걸어오실 객석의 여러분을 찬찬히 마중 나가고 싶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과 일요일, 공연장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