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위기’를 맞은 우리의 신체 언어
천샘
홍대 앞에서 젊은 현대무용가들을 위한 지식과 움직임의 놀이터, ‘감성스터디 살롱: 오후의 예술공방’과 ‘어반무브먼트 살롱: 댄서스라운지’를 이끌고 있다. [세월호1주기 추모 현대무용 공연: ‘팽목의 자장가’]를 기획-안무했고, 번역한 책으로는 우리를 먹지마세요!(두레아이들, 2011), 맹그로브:마을을 살린 나무(다섯수레, 2012), 북태평양의 은빛 영혼: 연어를 찾아서(돌베개, 2009)가 있다.
오랜만에 친구네 가족을 만났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기는 중학교 때부터 단짝 친구였지만 결혼 후 볼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집 근처로 이사를 오고, 저도 결혼을 해 아이가 생기다 보니 자연스레 가족끼리 어울릴 기회가 생긴 것이지요. 오랜만에 한식집에서 식사를 하는 풍경은 어렸을 적 부모님이 종종 데리고 가셨던 외식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하나 다른 점이라면 저는 더 이상 부모님 손에 이끌려가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무슨 무슨 가든’이라고 쓴 오래된 동네 한식집에는 ‘가든’에 알맞은 정원이 있어서 아이들은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뛰어놀 수 있습니다. 이 자리는 제가 일가를 꾸려 다른 가족과 처음으로 함께 하게 된 자리라 무척 설렙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오후, 창문 너머로 정원을 바라다보니, 밥이 나올 때까지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놀던 제 어렸을 적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러면서 초등학교에 다닌다는 친구의 아이 둘은 어떻게 놀아댈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제가 마주한 이 저녁의 풍경은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다릅니다. 아이들은 놀랍게도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식사가 나올 때까지 처음 착석한 자리에 앉아 미동조차 없습니다. 그렇다고 대화가 오고가는 것도 아니고, 눈동자조차 한곳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두 아이 모두 손에 휴대폰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이따금 폰을 반대 손으로 옮겨 쥘 뿐, 부모님과도, 오늘 처음 본 손님인 저희와도 말을 섞지 않습니다. 그나마 막내가 저희를 곁눈질하면서 휴대폰에 관심을 줄지 아니면 우리에게 말을 걸어볼지, 액정화면 너머로 조심스럽게 저울질할 뿐입니다. 얘깃거리는 차츰 떨어져가지만 차마 손님을 두고 평소처럼 휴대폰 검색을 할 수 없는 어른들 사이에서만 어색한 대화가 오고 갑니다. ‘밥은 언제 나와요?’, ‘아저씨는 뭘 하세요?’, ‘엄마 나갔다 와도 돼요?’, ‘식사 나올 때까지 마당에서 조금만 놀면 안돼요?’ 이런 질문조차 사라진 만남.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아 비비꼬는 상체 횟수가 한 번씩 늘어날수록 아이를 ‘아이’로 만들어주던 바로 그 몸짓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 나이에 가장 중요하게 습득해야 할 신체 언어를 무참하게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신체 언어 앞에서
저는 춤꾼입니다. 사람들의 신체 언어를 면밀하게 바라보는 습관을 갖고 있기도 하지요. 몸의 언어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담고 또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날의 저녁 풍경이 저에게 보여준 것은 ‘아이들에게서 사라져 가는 몸의 언어’였습니다. ‘멸종위기를 맞은 신체 언어’라고 해도 과한 표현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나른함과 지루함을 느끼고, 그럼에도 이를 견뎌내는 아이 본연의 몸짓. 기다림의 시간을 일분일초 단위로 음미하며 온몸으로 지루함을 발산하는 몸짓. 다시 말해, 나가놀면 안 된다는 부모님의 불호령이라도 떨어지면 아이는 처음에는 앞으로 남은 시간을 상상하며 하늘을 바라보는 힘겨운 고갯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고는 상체를 비틀면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어깨를 흔들어댈 수도 있지요. 야단을 맞는 그 와중에도 몸의 한군데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통제가 안 되어, 결국 양손이 수저와 물병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오두방정을 떨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부모님의 더 큰 불호령이 떨어지는 순간에는 두 손을 의자 밑으로 축 떨어뜨린 채, 눈동자만 말똥거리다가 지는 노을에 시선이라도 꽂히면 ‘만화에서 보던 장면이랑 똑같네’라고 혼자 작은 경탄을 읊조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삶의 기쁨, 경이, 고요함, 소소한 경탄 등을 느끼도록 허락하는 일련의 몸짓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루함, 나른함, 무료함 같은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다시 말해 핸드폰이나 자극적인 시각적 놀이에 의지하지 않은 채, 일분일초 단위로 지루함과 나른함을 온전하게 느끼고 체화하면서 얻어지는 선물인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몸의 움직임을 무참하게 빼앗아가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몸짓들을 잃어버리는 만큼 늘어가는 것은 굳어져가는 우리의 표정과 그만큼 응고되어가는 내면의 감정들인지도 모릅니다.
약해져가는 우리 사회의 근육
지금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내면의 근육들은 지루함을, 나른함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초고속 인터넷보다 더 빠른 인터넷이 나와야 하고, 멀쩡한 휴대폰을 두고도 바꾸고 싶도록 신형모델이 매년 출시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속도의 경쟁 속에서 나른함과 지루함을 허락하지 않고 죄악시까지 여기는 사회 분위기는 배설되지 못한 감정들을 양산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져오는 감정적 체증과 울혈의 단면으로는 ‘쉽고도 빠른 분노’가 있을 것입니다. 감히 단언컨대 우리 사회가 현재 몸살을 앓고 있는 분노의 증식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감정들과 우리 몸에서 표출방식의 경로를 잃어가는 우리의 신체 언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기를 데리고 남편과 산책을 나간 어느 날, 공원길을 지나는데 어떤 아이가 장난감 삼지창을 갖고 혼자 놀고 있더군요. “삼지창으로 뭐하니?” 남편은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곧장 남편에게 달려와 “이걸 하지요-!” 하더니 남편 엉덩이에 삼지창을 찌르고는 까르르 웃었습니다. 남편은 아파트 단지에서도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말을 걸지만, 이 아이처럼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나서 대답하는 아이는 처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놀랐고, 아이의 자연스러운 돌격에 파안대소했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이어진 길을 걸었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알지 못할 누군가를 향해 한번은 찔러보고픈 삼지창 장난감이 목적을 달성해서인지 신이 나서 우리를 따라오더군요. 얼마 못가 아이의 할아버지가 동네 골목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여느 할아버지들처럼 멀리 서서 아이를 부르는 대신, 저팔계를 인도하는 삼장법사 같은 마화 캐릭터 흉내를 내며 아이보다 더 흥이 나 달려오시더군요. 그러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우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할아버지와 놀기 위해 쏜살같이 달려가 버렸습니다. 사라져가는 우리 신체의 따뜻한 언어는 그렇게 그 길목에서 다시 튀어 나왔고, 무엇이 진정 자연스러운 모습인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아기를 재우려는 늦은 밤, 이제 6개월이 된 아기는 침대 위에 걸린 염소와 양 인형을 보고는 잡아보고 싶은 마음에 밤잠을 잊고 바라봅니다. 아직 손가락을 제대로 펴지도 못하면서 인형이 걸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습니다. 아기에게 보이는 저 인형의 나라는 어쩌면 꿈나라보다 신기한,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한 무엇이겠지요. 손을 뻗어 잡고 싶고, 만지고 싶고, 오물거리면서 함께 놀고 싶은 무엇. 하지만 아기가 제대로 손을 뻗쳐 인형들을 양 손에 쥐고 인형놀이를 하기까지는 좀더 긴 시간과 연습이 필요할 것입니다. 필요한 작은 근육들이 온전하게 발달해야 그제야 다섯 손가락을 쫙 펴고 인형들을 잡아 자신의 품 안에 놓을 수 있게 될 테니까요. 그전까지 아기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여러 번의 헛손질을 반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것 이전에 별것 아닌 듯 보이는 이러한 몸의 언어가 발달하는 과정을 온전하게 허락하는 일은 어쩌면 이 사회에서 부모의 위치에 선 우리 세대가 져야할 가장 큰 책임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 세대는 핸드폰이 나오기 전, ‘무슨무슨 가든’의 앞마당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말뚝박기를 하며 온갖 지루함과 기다림을 발산하고 이겨내는 법밖에는 몰랐던, 참으로 야무진 시절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을 기억해야할 책임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격월간 민들레. 2016. 16-12월호. vol. 108호. mindle.org.
'언론 보도 + 기획 공연 인터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장극장 블랙텐트]: 6일부터 ‘블랙텐트 시즌 2’ 막 오른다(경향신문, 17.2.2) (0) | 2017.05.03 |
---|---|
[광장극장 블랙텐트]: 춤꾼 총출동 ‘다음주 블랙텐트는 춤 주간’(한겨레, 17.2.24) (0) | 2017.05.03 |
'시대의 혐오를 움직임으로 풀어내다' (월간 몸, 2016.12월호) (0) | 2016.12.28 |
스토리펀딩 6화: '춤으로 바라보는 '혐오'의 또다른 모습' (16.12.6) (0) | 2016.12.22 |
스토리펀딩 5화: '폭력적 신체 언어를 '춤'으로 드러내는 일(16.11.29) (0) | 2016.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