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선 특집기획 1: 세월호 1년, 진행형으로서의 애도와 문화적 치유의 가능성]
그날, 치유는 있었을까.
천샘 | 오후의 예술공방 대표, 현대무용가
참사가 일어난 그날, 나는 제주도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나는 지인들과의 여행 일정이 잡혀 있었고 우리는 그날 아침 여객선의 침몰 속보를 들으며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2년 전, 처음으로 제주도에 가면서 비행기 대신 굳이 여객선을, 그러니까 세월호의 쌍둥이배라고 불리던 오하마나호를 탄 경험이 있기 때문에, 친구들와 함께 갑판에서 불꽃놀이를 보면서 신이 났을 아이들의 모습이 저릿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지인들과의 제주도 여행은 숨죽여 핸드폰으로 속보를 듣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머무는 내내 가시방석같았다. 서울에 돌아온 직후, 이 경험은 함께 무용을 해오던 동료들과 세월호 1주기 추모공연을 계획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렇게 2014년 4월부터 머릿속은 1년 뒤, 바로 지금의 이 계절을 그리면서 살았다. 그때 즈음이면 추모의 물결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금 온 나라를 뒤덮은 이 행렬은 과연 얼마만큼 확산되어 있을 것이며, 어떤 깊이를 담은 애도와, 참회와, 사회적 연대가 일어날까. 그때까지만 해도 시청 앞과 안산에 위치한 합동분향소에서는 추모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고, 국민적 애도의 물결 속에서 강력하게 유가족들을 지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막연하게 생각했다. 아마 지금의 분위기로 1년 즈음 지나면, 보다 더 단결된 사회적 ‘고통의 연대’가 보이지 않는 끈처럼 생성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오늘은 2015년 4월 15일.
1년여가 지난 지금, 상황은 추모공연을 구상하면서 작품 작업에 들어갔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어쩌면 내가 너무 순진했거나 내 상상력이 부실해서 갈등 없는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공연이 오르기 한 달 전, 팽목항과 안산의 유가족대책협의회를 다녀왔을 때만 해도, 우리와 대화했던 관계자분들은 별 일이 없는 한 유가족분들도 공연에 참석하실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몇 주 뒤, ‘세월호시행령’이 발표되었고, 가족들은 시렸던 지난 1년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광화문으로 나서야 했다. 그분들에게 이 봄은 시리기 그지없는데, 이 사회는 이제 그분들의 머리카락조차 고통으로 얼어붙은 몸뚱이를 감싸 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와 이 공연을 6개월여 함께 준비해왔던 ‘오후의 예술공방’ 식구들은 SNS에 올라온 어느 예술가의 말처럼 ‘자신이 1년여를 해봤지만 문화행동은 더 이상 소용없으며, 이제 거리로 나서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는 분노어린 외침을 차마 떨쳐내지 못한 채, 의구심 속에서 이 과정을 버텨왔다. 도대체 어느 게 답일까. 예술이, 양심이 온전히 기능하지 못하고 위태롭게 서있는 이 사회에서 나와, 그리고 함께 하는 예술가들이 굳건하게 딛고 일어서야할 지점은 어디일까.
작품을 준비하면서 나는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유가족 분들이 오실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 전자의 경우에는 우리의 몸짓이 혹여 가족분들의 아픔을 환기시키지는 않을지 염두에 두고 무용수들이 작품에서 발산하는 오열과 신체접촉의 수위를 낮추었고, 일반 시민분들만 오실 경우, 예술가로서 사건에 대한 고발의식을 품고 끝까지 간다는 방침이었다. 후자의 경우 무용수는 기둥을 붙잡고 육성이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울부짖음과, 배안의 사투, 그리고 내쳐지고 짓이겨진 몸의 멍들음을 움직임과 대사에 담아야 했다. 시행령이 발표되면서 가족분들의 발길도 자연스레 광화문에 묶인 이틀- 우리는 광장에서 물대포와 최루액이 난사되는 동안, 그분들이 겪으셨을 어떤 절규를 현대무용의 몸짓으로 담아내기 위해 분투했다. 연습하는 동안에도 다친 적이 없었는데, 본 공연 3회를 하는 동안 무용수의 무릎은 찢어졌고, 어깨에는 멍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시각, 광화문에서 대치한 모두의 존엄성이 난타를 당하던 그때, 그 고통의 일부라도 드러내야 할 예술가들의 최소한의 책무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실은 그날 아침, 나는 뉴스에서 한 어머니가 진압경찰의 방패에 맞아 갈비뼈 네 개가 부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분이 내가 팽목항에서 뵌 분 같아 울먹이며 극장으로 향했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으로만 보던, 이 사회의 주홍글씨 같은 이름인 ‘세월호유가족’들 중 한 분을 처음 뵈었을 때, 그리고 그 분이 공연 포스터를 어루만지며 아이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말해주었을 때, 공연을 준비하면서 내 안에 들었던 평범하고 보편적인 연민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친밀한 슬픔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어머니가 한 달 후 처참하게 방패로 으스러지는 듯한 사진을 보았을 때, 머릿속은 하얘졌다. 무용이, 특히나 ‘모든 움직임은 춤이다’라는 폭넓은 정의를 지닌 현대무용이 답해야할 가장 시급한 화두는 ‘둘다 움직임을 기반으로 하는 ‘폭력’과 ‘춤’ 사이에서 어떻게 지금과 같은 가혹하고 비참한 물리적 폭력을 움직임의 언어로 고발해야할 것인가’에 있다.
어떤 움직임이, 예술이, 문화가, 혹은 문학이 감히 누군가의 슬픔을 ‘치유’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리다’는 표현만으로는 모자란 그분들의 고통을 우리가 감히 ‘치유’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술은 다만 팽목항까지의 삼보일배로, 광화문에서의 집회와 단식으로,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의 밑바닥을 절절히 흐르는 눈물과 기도 속에서 어떤 ‘희미한 회복’을 향해 나아가시는 그분들이 잠시 기댈 난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숨가쁜 여정에서 땀과 눈물을 훔치는 손수건의 역할을 할 수만 있다면, 한 번 닦아내고 버려지는 휴지조각이 된다 한들 그 예술은 위대하다. 다만 일회용 휴지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도 어설픈 감상이나 과도하게 이념화·이상화된 사고보다는, 상대의 고통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는 만큼만 정직하게 답하려는, 겸손한 내면의 감수성이 요구되지 않을까 싶다.
이틀 동안 우리는 관객들과 울었고, 전국에는 비가 내렸다.
2015년 4월 16일, 비가 내린 것이, 날씨가 조금은 쌀쌀하고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광화문에서 몸과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그분들을 위로했던 것은 흐릿한 날씨였을 것이다. 그분들은 느꼈을 것이다. 이 빗물은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조용한 눈물이며, 농성을 시작한 엄마 아빠의 그을린 속을 잔인한 봄볕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아이들이 빚어낸 눈물의 차양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몸짓도 그 작은 볕 가리개의 일부였기를, 조심스레 바랄 뿐이다.
천샘
젊은 무용인들을 위한 초경량 지식투척 프로젝트, ‘감성스터디 살롱:오후의 예술공방’과 이들의 움직임을 실험하는 무대인 ‘어반 무브먼트 살롱: 댄서스 라운지’를 홍대앞에서 운영하고 있다. 돌아오는 우리의 봄이 너무 시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월호 1주기 추모 현대무용 공연: ‘팽목의 자장가’」를 기획했고,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풀꽃평화연구소(생태`환경 분야)의 연구원으로서 웹진 『풀꽃평화목소리』의 필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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