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나의 찬란한 황조롱이
2021 <전사의 땅> 재연을 준비하며, 안무가의 글
천 샘 | 오후의 예술공방 대표
저는 공원이 보이는 아파트에 삽니다. 그래서인지 봄의 한 철이 되면 아파트의 실외기로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틉니다. 관리실에서는 방송을 하죠. 새가 날아와 똥을 싸고 가면 실외기가 망가질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어떤 집에서는 새들이 앉지 못하도록 그물망을 쳐놓기도 한다는데요. 저희 집에는 아이가 있어 새들이 날아오면 아침마다 구구~ 하고 새들이 앉아 지저귀는 소리를 아이에게 들려주곤 합니다.
며칠 전, 황조롱이가 날아왔습니다. 분명 구구~ 소리가 나는데, 비둘기 소리와는 달라 조심스럽게 블라인드를 들쳐보니 황조롱이였습니다. 사실 뒷모습만 봐서 황조롱이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비둘기의 회색이 하닌 황갈색에, 몸집이 좀더 크고, 제가 아는 새들 이름 중에 뭔가 ‘황색’ 느낌이 있는 이름이 ‘황조롱이’뿐이라서, 아이에게 황조롱이라고 일러 주었지요. 우리는 그리하여 그날 “황조롱이”를 보았고, 그 새는 아이와 저의 수선한 호기심을 알아채고는 유려한 자태를 뽐내며 날아갔습니다. 황조롱이가 찾아와준 그 아침은, 즐거운 분주함 속에 우리 집 에어컨 실외기가 드디어 비둘기들뿐만이 아닌 새들의 공식적인 안식처로 인정받은 날이었습니다.
< 전사의 땅 >은 2019년 무용계 첫 미투 사건으로도 알려진 유명 안무가 위력성추행 사건의 법정 공방이 진행되면서 당시 법정과 무용실을 오가던 저와 권이은정, 그리고 연대인이었던 김하람이 힘을 모은 작품입니다. 작년 8월, 본 사건은 대법원에서 항소심 판결을 인정하며 마무리되었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최근 몇 년간 무용계를 포함한 문화예술계의 치열한 화두는 ‘어떻게 보다 안전하고 성평등한 창작환경을 구축할 것인가‘였습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 탄생한 이 작품을 꽤 오랫동안 준비하여 드디어 작년 9월에 온라인 공연과 쇼케이스 형식으로 초연하게 되었는데요. 당시 제가 안무자로서 상상해 보았지만, 차마 실현시키지 못한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실은 올 해 아르코예술극장에서의 공연이 확정된 연 초까지도 실현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장면입니다. 바로 성폭력 피해생존자로서의 정체성을 내재한 대한민국 여성 시민들이 ’시민 무용수‘로서 무대 위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 전사의 땅 >의 안무적 핵심은 현실과 허구를 긴장감 있게 넘나들려고 노력한 장면 구성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군무 장면에서는 여성 무용수들이 장내로 울려 퍼지는 장엄한 북소리와 함께, 힘차게 동작을 내딛으며 폭력의 역사를 되물림하지 않으려는 다짐이자 선언과도 같은 움직임을 반복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떤 테크닉도 필요 없이 체력이 좋으면 완주할 수 있는 안무로 구성하였죠. 8분 정도의 군무인데 나중에는 거의 체력장 수준으로 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듯 가닿지 못한 어떤 이상향에 닿기 위해, 달리다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려야하는 이 오래달리기의 여정을 삶에서 실제로 해온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즉 프로 무용수로서 다져진 체력이 아니라 숱한 질곡에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온 누군가가 있어, 이 장면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작품 속 진실이 그녀에게는 이미 삶을 통해 수십 번, 수백 번, 고귀한 힘으로 비축되어 8분여의 군무를 완주하는 장면을 꿈꿨습니다. 그러다가 ‘구구’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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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는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공식적으로 불리는 예명입니다. 아파트에 해마다 머물고 간 비둘기 친구들이 아닌, 조금 다른 체격과 다른 구구~ 소리를 내는 아름다운 황조롱이 같은 예술가입니다. 제가 안무가로서 꿈꿨던 지점, 즉 두터운 체험적 진실의 깊이를 내재한 '시민 무용수'의 움직임이 삶을 건 선언으로써 발언되고, 따라서 허구에 기반한 예술작품이 아닌 치열한 현실에 근거한 ‘예술적 진실의 추구’ 속에서 만난 답입니다. 이는 단지 < 전사의 땅 > 뿐 아니라 실은 본 공연의 세 작품 전체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구구가 어떻게 스스로 거기까지 이르렀는지는 모르지만, 8분여를 뛰고 나면 댄서들도 발이 풀려 입에 단내가 나는 군무를 그녀는 기어코 해냅니다. 물론 동작이나 박자는 다른 댄서들보다 투박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녀는 달립니다. 삶에서 얼마나 달렸길래 체력으로는 왠만하면 밀리지 않는 프로 무용수들보다 잘 달릴까-. 그녀의 몸짓이 뿜어내는 힘찬 선언은 저에게는 넋을 잃고 황조롱이를 바라보는 듯한 아름다움이고, 예술로 가닿고자 했던 궁극적 이상향이자 찬란한 너른 벌판입니다. 움직임이 삶의 진실을 담보한 ‘힘찬 선언’이 되는 순간입니다.
공연이 재연되면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어떤 부분이 보완이 되었는지 입니다.
제가 드릴 답은 이것입니다. 저는 따뜻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어떤 ‘두터운 진실’을 만났고, 그 진실의 몸짓이 선언이 되는 순간을 통해 너른 벌판을 펼치고 싶습니다.
‘신비로 들어가려는 겸허함이 없는 인간에게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구구는 제가 예술가로서 막연하게 꿈꾸던, 작품으로 가닿을 수 있는 어떤 실존적 진실에 근거한 궁극적 이상향, 즉 아직은 가닿지 못해 늘 목마른 신비-로 들어가는 작은 문입니다. 때문에 어느 한 순간도 쉽지 않았던 본 공연의 준비과정 속에서, 무너지다가도 다시 미래를 꿈꾸게 한 힘찬 지저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 찬란한 몸짓이 메이리치길- 바랍니다.
ps. 조금 서툴고 다를지라도, 그가 무대에 선 것만으로도 여름 호우처럼 우렁찬 박수가 밀려들어와 구구의 지난 슬픔을 만져주기를, 그리하여 그가 거쳐온 모든 삶의 계절들이 ‘가치있는 견뎌냄’이었음을- 그날 극장을 채울 우리 모두가 함께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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