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재구성:‘전사의 땅’ 위에서 돌아본 어떤 ‘평범한’ 용기에 관하여
권이은정, 김하람, 천샘, J희망
<전사의 땅> ⓒ천샘
무용수의 기억 1
흔들리는 지하철 안, 점잖게 신문을 읽는 아저씨와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여성 승객을 성추행한다. 화가 난 여성이 이들을 응징하려 하자 도리어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대며 성질을 부린다. 관객석에서는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들린다. 천샘 안무가의 실감나는 아저씨 연기와 김하람 무용수의 천연덕스러운 표정 때문이리라. 하지만 웃는 사람 모두 마음 한켠으로 씁쓸함을 느꼈을 것이다. 연기가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과를 안 하는 이유가 뭐예요. 사람을 차고?!” 지난 7월 말, 자정이 가까운 시간. 지하철에서 찍은 휴대폰 영상에서 내 목소리가 찢어져 나온다. 다른 승객들처럼 자리에 앉아 귀가하던 한 이십 대 여성이 자기 앞에 선 남성 노인에게서 아무 이유 없이 몇 차례나 발길질을 당하고 참다 참다 큰 소리로 항의하는 걸 듣고, 득달같이 달려가 함께 사과를 받아내려는 중이었다.
형형색색 멋들어지게 등산복을 차려입은 백발의 노인은 사과는커녕 한술 더 떠 우리에게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댔다. 실소가 나왔다. 찍힌다면 본인이 찍혀야지, 뭘 잘했다고 피해자에게 카메라를 들이대? 그리고 찍으면 어쩔 건데? 그게 무슨 대단한 무기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그런데 놀라웠던 건 피해 여성의 반응이었다. 기겁하며 당장 지우라고 난리를 쳤다. 가해자는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불법 촬영한 사진이 삭제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본인이 찍은 사진을 어디에 어떻게 올리는지도 모를 것 같은 이 고령의 남성에게, 정확히는 그의 카메라에, 속절없이 휘둘리고 있었다.
<전사의 땅> ⓒ(재)마포문화재단
그 상황은 우리가 연습하고 있던 <전사의 땅>의 한 장면과 너무나 흡사했다. 내가 연기한 여성은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당하고도 가해자가 휘두르는 카메라 공격에 대응을 포기하고 자리를 떠나버린다. 처음 연습할 때는 그 장면이 이해되지 않았다. 고작 사진을 찍는다고 못 덤빈단 말인가.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보니 분하지만 맞는 얘기였다. 이것이 바로 이 사회가 키운 몰카 피해의 공포다.
노인이 예의를 지키라며(?) 계속 고집을 피우니 어떤 중년 남성이 와서 우리보고 그만하란다. 그러고는 “어르신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요새 세상이 그렇지 않으니 사진을 지우셔야 한다”라고 말하며 가해자를 어르고 달랜다. 참으로 눈물 나는 형제애였다. 한심한 두 인간이 합심하는 모습까지 공연 장면과 닮아있었다.
그만할지 말지는 우리가 결정한다며 물리치고, 계속 큰 소리로 노인의 잘못을 짚으며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에게 인계했다. 길거리 혹은 지하철에서 이유 없이 남성 행인에게 맞고 같이 싸우다 경찰서로 끌고 가는 일을 이십 대부터 숱하게 겪어왔지만, 분노는 늘 처음처럼 쉬이 가시지 않는다.
출·퇴근을 하거나 약속 장소로 이동하며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어떤 이에게는 일을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쿨쿨 자기 바쁜 곳이지만, 여성에게는 언제라도 일촉즉발의 전쟁터로 돌변할 수 있는 곳이다. 지하철에는 출신학교도, 경력도, 직함도 없고, 오직 (겉으로 추측할 수 있는) 성별과 나이만 있으며, 여자에게는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만 보던 일이 실제로 일어날 줄은 몰랐다며 도와줘서 정말 감사하다고 눈물을 흘리던 피해 여성과 이런 공연을 만들어줘서 정말 고맙다고 연신 인사하시던 관객들의 모습은 어딘가 닮아있었다. 여성 혐오는 온라인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공기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 무뎌져 있을 뿐이다. “《82년생 김지영》은 SF 소설”이라는 한 남성의 인터넷 댓글이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직접 겪은 일을 누군가는 내가 특이해서 벌어진 특수한 일로 치부할 것이고, <전사의 땅>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관객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딛고 있는 땅이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니 발을 구르고 점프를 하고 바닥을 자유로이 쓰는 무용수가 이 기울어진 땅을 모른 척하고 고고히 ‘예술’만 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쉽지 않은 일이 번번이 벌어진다. 생면부지의 사람도 발로 차고 사진을 찍으며 위협을 하는 판에, 학생이나 무용수의 커리어를 쥐락펴락하는 교수나 안무가가 자신의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 무슨 성찰을 하겠는가. 반성은 한다면서도 범죄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재판장에게 사과할지언정 피해자에게는 용서를 구하지 않는 가해자와, 무용계 위력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를 동정하고 감싸는 수많은 2차 가해자에게도 이 기울기는 체감되지 않는 것이다.
<전사의 땅> ⓒ(재)마포문화재단
천샘 안무가의 제안으로 무용계 반성폭력 단체 ‘오롯 위드유’ 활동을 하며 가장 많이 했던 선언은 “가해자를 위한 무대는 없다”라는 것이다. 부담이나 강요로 다가갈까 봐 조심스러워 말도 꺼내지 못했지만, 피해생존자가 그토록 좋아하고 열심히 하던 춤을 언젠가는 다시 출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사실 더 컸다. 혹시 생존자가 이 공연을 보게 된다면 그것을 계기로 무대에 다시 서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좋겠다는 주제넘은 생각을 하며 이 공연을 준비했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이 분노를 뜀으로 표출하는 장면을 출 때는 당시의 트라우마를 다시 떠올리게 할까 봐 조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공연을 마치고 생존자와 함께 부둥켜안고 울면서 진심이 통했다는 생각에 안도했고, 이렇게 맘 놓고 전사가 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쌈닭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되기 싫어도 전사가 될 수밖에 없도록 생겨 먹은 이 땅이 문제다. 하지만 이 기울기는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바로잡아야 하고 분명 바로잡을 수 있다. 그 싸움의 정당성을 알리고, 싸움의 기술을 전하고, 함께 익혀나가는 과정에 무용과 예술이 좀 더 자주 함께하기를 바란다.
- 권이은정
무용수의 기억 2
이번 공연의 시초가 된 무용계 위력 성폭력 사건을 뉴스로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계’ 안에서 익숙하게 들어본 이름 때문에 꽤 놀랐다. 그리고 뉴스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개인적으로 분노했다.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는 스스로 압도당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생존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개인적 공간에서 믿을만한 사람들과 한탄이나 분노의 감정을 확인하는 정도다.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해온 동료가 피해자를 위한 연대 활동을 시작했다는 근황을 전해 들었다. 연대 활동을 한다는 건 에너지와 시간을 들이는 일이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현장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공분을 느꼈다. 작품의 과정을 함께 하게 되면서 방청연대에 함께하고 탄원서 글귀를 고민하였다. 동료의 활동에 조금씩 참여하며 ‘연대의 연대’가 내 안에 점차 스며듦을 느꼈다. 특히 뉴스로 접하는 단축된 사건의 개요가 아닌, 법정에서 실체를 보고 듣게 되면서 몸 안에 숨어 있던 기억과 경험이 공명하는 것을 느꼈다. 더군다나 최근 무용 심리치료를 전공하며 몸의 트라우마에 관심이 있었기에 피해생존자의 몸의 경험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다시 탄원서를 쓰게 되었을 때는 좀 더 정신을 차리고, 내가 아는 지식과 사실, 그리고 절실한 마음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깨어있는 목소리를 모아야 피해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런 과정들은 이 공연을 준비하는 데에 동기를 부여해주었고, 주제에 대한 이미지나 방향성을 잡아나가는 데 영향을 주었다.
<전사의 땅>이라는 작품 속, 옴니버스처럼 다양한 상황으로 구성된 흐름 속에서 나의 캐릭터는 다양한 군상을 드러낸다. 일상의 여성, 지하철 성추행범, 몰카범, 악플러, 방관자 혹은 피해자, 그리고 벌판에서의 여성까지. 사실 지하철 성추행이나 몰카 등은 여성들이 흔하게 겪는 일상이다. 그만큼 여성의 몸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만나는 것은 너무나 피부에 와 닿는 감각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굽이굽이 흘러 벌판에 서 있는 지점으로까지 도달하는 것은 내게 참 어려운 일이었다. 벌판 위에 있는 여성, 벌판은 무엇이고 벌판 위에 서 있는 몸은 과연 어떤 몸일까? 작품 속 군상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고민은 계속되었다. 장면을 해석하기 위해 작품에서 제시하는 감각들을 나의 일상에서 찾아보기도 했다. 그것은 결국 나의 삶 전체를 반추하는 일이었는데 어떤 때에는 나의 무기력하고 위축된 여성의 몸의 면면들이 떠올라 용기를 잃고 좌절하였다. 내가 분노해야 할 지점에서 분노하는지, 혹은 어떤 경향에 의해 혼자서 삭이고 목소리를 줄이는지, 아니면 삶에 대한 의지를 몸으로 경험하는지, 여성으로서의 자신감과 안전을 찾을 수 있는지 등 참 오랫동안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전사의 땅> ⓒ천샘
싸우는 것은 여성의 몸에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다. 대부분의 여성은 위기에 직면하면 피하거나 최선을 다해 소극적으로 방어한다. 몸과 마음이 꽁꽁 묶이고 입이 틀어 막힌 이들은 ‘여성적’이라고 생각되고, 잠깐씩 그 족쇄에서 빠져나온 여성들은 ‘불량하다’고 매도되며, 너무 많이 시달려 정신에 치명타를 입은 여성은 ‘신경 쇠약자’로 불리1)곤 한다.
나는 가스라이팅과 몰카 피해 경험이 있지만 싸우는 것으로 대항해 본 적은 없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방어에 힘썼다. 물론 방어의 모든 형태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들로부터 목숨을 지키게도 한다. 하지만 세상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몸을 크게 해서 위협에 대항하거나, 몸을 움츠려 공격할 준비를 하는 적극적 방어 태세도 필요하다. 나의 현존하는 경계를 표현하는 일, 다시 말해 여성의 몸에도 붉은 에너지인 ‘건강한 공격성’과 ‘야성의 회복’이 필요하다. 이 감각은 의도적으로라도 불러오고 연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가부장적 남성문화가 만들어내는 구조적 억압과 심각한 범죄 등 다양한 군상들은 반드시 딛고 일어나야 할 벌판의 모습이기도 하다. 침묵하지 않는 목소리들은 계속되고 있고 조금씩 세상에 균열을 내고 있다. 수많은 사람의 일어섬,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세찬 물결의 흐름이 나의 몸과 시간에도 맞닿아 흐르고 있다. 공연이 연기되어 공백이 허용된 동안에는 내 안에 있는 두려움과 도피의 방어 본능들을 다독이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건강한 공격성이 갖는 생기를 떠올리며 작품 속의 벌판을 디딜 ‘용기’를 연습했다.
<전사의 땅> ⓒ(재)마포문화재단
9월 초연 일정이 다시 잡히고 관계자 쇼케이스 형식으로라도 소수의 관객과 만날 수 있어서 감사했고 안심했다. 특히 생존자분이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쑥스러운 마음과 함께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고 걱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공연 후 생존자분에게 꽃다발이 전해지는 순간, 왈칵 눈물이 올라왔다. 모두가 함께 울었다. 그 마음들을 어떻게 표현할까. 모두가 함께 같은 것을 느끼고 분노했으며, 위축된 순간도 있었으나 또 싸워나갔다. 우리가 열심히 준비했던 작품은 나의 삶과 우리의 삶 안에 공명하는 실재이기도 한 것이다. 모두가 동참했던 싸움이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같아 안도감과 승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과정을 굳건하게 버텨준 생존자가 마지막을 함께했다.
무대라는 공간을 벌판 삼아 열심히 작품의 에너지를 주고받은 일은 나의 몸과 일상에 후련함과 개운함을 주었다. 그 사이 나의 삶은 아주 작은 변곡점을 맞았다. 이와 같은 주제에 관심을 이어나가고 있고, 그와 관련된 무용치료 작업과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또한, 오후의 예술공방에서는 이번 작업을 토대로 다음 프로젝트인 <세상의 배경 2탄: 환경>2)을 위해 ‘기후변화’에 관한 안무 리서치를 진행하고 있다.
바쁘고 치열하게 살고 있는 일상 속, 문득 가슴 한구석에 비어 있는 공간이 있음을 느낀다. 그 공간에는 공허한 바람이 부는 것 같다. 나는 그곳이 공허함과 지침의 바람이 지나가는 ‘벌판의 공간’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벌판의 이미지가 비록 척박하기는 해도 힘차게 밟았던 두 발과 심장의 진동 덕분에 생긴 게 아닐까.
- 김하람
안무자의 복기
<전사의 땅>은 작년 무용계를 들썩이게 만든 유명 안무가 위력 성추행 사건의 1심 선고를 앞두고, 판결이 불리하게 나올 경우 연대는 불복하며 끝까지 달려가겠다는 의지를 무대에서 선언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2018년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여러 굵직한 위력 성폭력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2020년의 하반기인 지금에서야 위력 성폭력은 더는 우리 사회에서 용납되어선 안 될 중대범죄로 인식이 전환되고 있지만, 2019년만 해도 상반되는 판례들이 설전을 벌이며 치열하게 ‘현재 진행 중’이었고 실은 아직도 그러하다. 더군다나 무용계에서는 선례가 없었다. 제대로 된 선례조차 없는 상황에서 ‘계’의 침묵이 이어진다면 피해자는 고립되어 고군분투하다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기에 재판이 시작될 때만 해도 전혀 승리를 예측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미디어오늘의 첫 보도를 시작으로 한겨레, JTBC 뉴스룸, 국민일보, 서울신문, 오마이뉴스 등 다양한 매체에서 사건을 공론화하였고, 피해자를 중심으로 예술가들과 시민들의 뜨거운 연대가 형성되었다. 그런데도 성범죄 사범들의 가벼운 양형 역사에 부합하듯 패소할 경우, 오늘의 피눈물을 굿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무대에 풀어놓기 위해 만든 작품이 바로 <전사의 땅>이다.
<전사의 땅> ⓒ천샘
1심 선고는 치열한 법정 공방을 거듭하며 작년 가을에서 겨울로, 결국 올해 1월까지 늦추어졌다. 그러나 보수적이라는 평을 받았던 1심 재판부에서조차 사건은 크게 승소하며 언론매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3 우리는 1심의 승소와 더불어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맞춰 “여성 무용수들의 선언적 움직임을 통해 대한민국 여성 시민들의 신체주권을 회복한다”는 주제로 초연 일정을 확정하였다. 하지만 신천지로 인해 코로나의 확산세가 거세지면서 9월로 전체 일정을 연기하였고, 9월이 다가왔을 때는 거리두기 좌석제를 실행하다 보니 3월에 비해 좌석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많은 분이 공연 소식을 듣자마자 티켓을 다시 구매하였고, 3월에 단체관람을 신청한 여성단체 역시 한달음에 단체관람을 다시 신청하여 준비된 티켓은 열흘 만에 모두 소진되었다. 공연을 올릴 때마다 지인이 아닌 생소한 이름의 관객들이 늘어날수록 가슴이 벅차오르며 예술가로서 책임감도 커진다. 특히나 이번 공연의 관객층은 현대무용이라는 장르에는 생소할지라도 우리 사회의 현안들에는 매우 날카로운 전문가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20대~30대 여성 관객의 뜨거운 지지와 티켓을 재구매한 비율이 높다는 사실도 감사했다. 이번 공연만큼 안무가로서 작품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 적은 드물다.
티켓이 조기 매진되고 조명 리허설에 박차를 가하던 8월 중순, 우연인지 필연인지 광화문 집회로 인한 코로나 재확산이 시작되었다. 3월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기하급수적으로 확진자가 증가하면서 다시 한 번 팬데믹이 몰고 온 폭풍의 눈 한가운데 이 작은 공연이 놓인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문을 닫을 것인가, 그렇다면 6개월을 기다려 티켓을 다시 구매한 관객들은 어찌하나, 지금 상황에서 예술가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최선의 의무는 무엇인가, 문을 닫는 것이 정령 도리를 다하는 길인가, 오늘의 현실 앞에서 올바른 대안은 없는가…. 초연 예정이었던 3월에는 문을 닫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이 들어서 모든 티켓을 환불하고 공연을 취소했지만, 이미 한차례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하우를 얻은 우리는 위기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 보다 확장되어 있었다. 그렇게 ‘재난 시대의 예술’과 ‘재난 상황에 응답해야 할 예술가의 책임’에 대해 가위가 눌릴 만큼 고민한 끝에, 본 공연의 창작진과 제작진은 아래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3회차 모든 공연을 온라인 공연으로 전환하였고, 이와 동시에 사전설문과 개별 연락을 통해 본 공연의 직접 관람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신 20대~30대 여성 관객 대표 4인, 본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연대 단위의 젊은 예술가들, 이번 공연의 무용사적 의미에 주목한 춤비평가들과 사건의 피해생존자 ㅇㅇㅇ님을 회차당 10명씩 나누어 모시고 비공개 쇼케이스를 2회에 걸쳐 진행하기로 확정하였다. 쇼케이스는 무료로 진행하였지만 다행히 마포문화재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재정적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그리하여 1회차는 관객 대표 및 젊은 연대인과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2회차는 ㅇㅇㅇ님을 지지하며 무용사적으로 기록할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여러 겹의 보안 속에서 진행되었다. ㅇㅇㅇ님이 쇼케이스를 관람한다는 사실은 객석의 분위기가 고무될 것을 우려하여, 공연이 끝난 후 무용계 반성폭력 연대 ‘오롯 위드유’에서 준비한 꽃다발이 무대 위로 올라올 때까지 비밀에 부쳤다.
처음 만난 날이었던가, ㅇㅇㅇ님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가 용기를 낸 이유는 생각보다 소박했다. 고통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대로 살다간 자신이 죽을 것 같아서, 그래서 무엇이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그의 소박하고 평범한 용기는 이 작품의 출연진을 포함한 수많은 문화예술계 종사자들과 대한민국 법원을 -지방법원에서 고등법원, 그리고 결국에는 대법원까지- 한 치 망설임 없이 모두 그의 편에 서게 했다. 그날의 무대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그의 용기를 떠올리면서 이런 질문을 해보게 되었다. ‘용기라는 것이 실은 ‘평범한’ 것이 아닐까?’ 용기라는 것은 거대한 무언가, 다시 말해 온몸에 휘감으면 두려움이 휴지 조각처럼 소멸하는 슈퍼맨의 망토 같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고통스러운 번민 속에서 수많은 밤을 보내고 난 후 끄집어낸 한 줌의 소박하고 정결한 결단 속에, 무언가가 깃들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한 용기가 승리를 약속하지는 않는다. 이 싸움도 그러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전사의 땅> 역시, 바로 지금, 이 시각, 그 한 뼘의 용기를 위해 밤잠을 설치고 있을 누군가에게 바치는 움직임을 통한 위로와 용기의 담금질이다.
이 원고의 마지막 주자는 본 사건의 피해당사자이자 지난 1년 동안 법정 재판과정을 뜨겁게 완주한 ㅇㅇㅇ님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를 본명 대신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가명이자, 매 순간 연대의 희망이 되어준 ‘J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는 2회차 쇼케이스를 모두 관람하였고 그의 용기가 응집시킨 연대 단체와 개인, 그리고 관객 대표들의 우렁찬 박수 속에서 지난 1년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하였다.4) 그의 목소리를 듣기 전, 우리는 그를 이 글에 초대하자고 제안해준 웹진<춤:in>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3심 모두 크게 승소한 이후,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미투생존자’라는 프레임을 연출하고 싶은 매체들의 연락이 있었다. 그런데도 <춤:in>과 함께하고자 결심한 이유는, <춤:in>에는 극적인 연출이나 편집 없이도 그의 목소리를 덤덤하게 받아낼 힘이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건의 화제성이나 생존자의 드라마 혹은 극적인 무엇이 아니다. 그저 우리 모두를 1년 동안 뜨겁게 감염시켰던 용기의 단면을 독자들과 차분하게 나누는 것이면 족하다.
- 천샘
관객의 복기
- 성폭력 생존자의 리뷰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하는 여성들 대부분은 실제로 자신이 그러한 일들을 당하면 자리를 떠나버리거나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한다. 나는 그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무섭고, 당황스럽고, 그러한 상황들에 충분히 훈련되어 있지 않았기에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새는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많이 보인다. 누군가의 용기 있는 목소리 하나가 나비효과가 되어 다른 여성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어느 순간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하면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러한 여성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취향이 있겠지만, 나는 무용 공연을 보거나 만들 때 작품의 의도나 주제를 숨기지 않고 여과없이 드러내는 친절한 공연이 좋다. 때로는 B급이라고 불리는 그런 작품들에 마음이 간다. <전사의 땅>도 겉으로 봤을 땐 유쾌하고 재치 넘치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메시지는 절대 가볍지 않다. 요약하면 상냥하게 웃으며 강력한 분노를 표출하는 작품이다.
작품에는 꽤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오는데 그 중 농약을 뿌리는 아저씨가 인상 깊었다. 하다 하다 무대에서 농약 뿌리는 기구를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실감나는 소품과 무용수들의 열혈 연기 덕분에 글을 쓰는 지금도 웃음이 새어 나온다. 다시 생각해 봐도 무거운 주제를, 보는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거나 어렵지 않도록 해주는 재기발랄하고 유쾌한 공연이었다.
<전사의 땅> ⓒ(재)마포문화재단
공연을 보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괴로웠던 지난날의 기억보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이었다. 나와 비슷한 경험과 고민을 가진 여성들이 정말 많으며, 나와 그들이 느끼는 분노와 여러 감정은 닮아있음을 느꼈다. 그만큼 <전사의 땅>의 한 장면, 한 장면 모두 결코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고, 자신들이 직접 겪은 경험에 비추어 오랫동안 생각하고 고민한 흔적이 느껴져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작품의 제목인 <전사의 땅>처럼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은 안전하지 않다. 안전함을 느끼고 있을 때도 계속해서 주위를 경계해야 한다. 항상 위험은 가장 가까운 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슬프지만 평범한 사람도 전사로 만들어 버리는 땅이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무용수들이 발을 구르고 가슴을 치며 온몸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장면에선 여성들이 가진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공연이 끝나고 무용수들을 마주하니 여운이 남아 눈물이 줄줄 나왔다. 무용수 세 분 모두 눈이 정말 크고 깊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말보다 많은 걸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할 다른 피해자분들에게,
당신이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며
부끄러워해야 할 일도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이것을 깨닫는 데에만 4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기자님들을 시작으로 가족과 애인, 변호사님, 오롯 위드유,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트라우마치료연구소, 한국여성민우회, 학교 내의 상담센터, 정신의학과 전문의, 연대인 등 여러 기관에서 전문적인 도움과 지지를 받은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여기 당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롯 위드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읽었던,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문장이다. 나에게는 그 문장이 마치 외롭고 끝도 안 보이는 터널 안에서 발견한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생전 만난 적 없는 남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있을까.
긴 시간 동안 오롯 위드유는 끝까지 무거운 책임을 지고 함께 싸워주셨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그 여정에 기분 좋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도록 모두에게 큰 의미가 있는 멋진 공연을 만들어 주신 <전사의 땅> 안무가님과 무용수분들, 원고를 맡겨주신 웹진 <춤:in>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글을 마치려 한다.
- J희망
2회차 쇼케이스가 끝난 후 무대에 띄워진 출연진의 감사인사 ⓒ천샘
- 1)클라리사 에스테스(Clarissa Estes),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12p
- 2)<세상의 배경>은 우리 사회를 포함 전 지구적으로 그동안 ‘배경’으로만 여겨져 왔던 여성, 동물, 환경을 키워드로, 팬데믹 속 그들의 목소리를 찾아나가기 위해 오후의 예술공방에서 기획한 3부작 리서치-공연 시리즈이다. 그 중 첫 번째 키워드인 여성을 주제로 한 <전사의 땅>이 2020년 9월 올라갔고, 두 번째 주제인 ‘환경’과 ‘기후 변화‘를 주제로 한 리서치-공연 결과물이 내년 9월 25일 ’세계 기후 행동의 날‘에 맞춰 올라갈 예정이다.
- 3)‘제자 위력 성추행’ 유명 무용가, 1심서 실형.. ‘애정표현 아닌 범죄’, KBS뉴스, 2020.1.8.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358441&ref=D
- 4)한 명의 피해자를 위한 공연, 객석에서 울음이 쏟아졌다, 강연주 기자 오마이뉴스 2020.9.9.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73877&CMPT_CD=P0001&utm_campaign=daum_news&utm_source=daum&utm_medium=daumnews
권이은정_무용수, 아프리칸댄스컴퍼니 따그 대표
권이은정은 매년 서아프리카를 방문하여 전통춤(Mandingue dance, Sabar dance)과 아프로 컨템포러리 댄스를 수련하며 ‘아프리칸댄스컴퍼니 따그’의 대표와 ‘오후의 예술공방’의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다.
김하람_무용수, 무용·동작치료사
김하람은 대학시절 기독교학과 청소년학을 공부한 후, 현대무용을 전공했다. 무용을 하면서 신체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마음에 관심이 생겨 무용·동작 심리치료를 공부하였다. 현재 ‘오후의 예술공방’에서 무용수로 작업하고 있고, 무용·동작치료사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천샘_안무가
천샘은 ‘예술가 시민’이라는 표현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를 본인의 정체성으로 삼고자 한다. 시민들 위의 예술가가 아닌, 시민의식을 장착한 예술가로서 역할과 이를 바탕으로 발화하는 ‘발언으로서의 작품’이 지닌 예술의 역할을 믿는다. “춤은 우리 사회에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작업하고 있다.
J희망
J희망은 류00 안무가의 위력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다. 고마운 분들의 도움 덕분에 사건에서 승소한 이후로 몸도 마음도 건강해져서, 감사한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하루하루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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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 재구성: ‘전사의 땅’ 위에서 돌아본 어떤 ‘평범한’ 용기에 관하여
무대의 재구성: ‘전사의 땅’ 위에서 돌아본 어떤 ‘평범한’ 용기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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