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나이듦을 추앙할 수 있는가-.
천 샘 | 안무가
최근 이야기를 나눈 지인의 말처럼 사람들은 ‘죽음’ 보다는 ‘나이듦’을 더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하는듯하다. ‘죽으면 죽는 거지 뭐’ 하고 쿨하게 내뱉는 말은 자주 들었으나,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온 몸에 굽이치는 주름과 흰머리, 몸과 마음의 쇠잔함 앞에서 쿨내 진동하는 삶은 아직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 염색약, 건강보조제 등 나이듦을 비껴가려는 수많은 시도와 선전들 속에서 ‘건강은 흠숭해야할 신’이 되고 ‘나이듦은 죄악이 되는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다. 세월의 주름을 온몸에 덧입은 노인은 더 이상 공동체 안에서 지혜를 장착한 현명한 인간으로 존경받지 않는다. 그보다는 초라하고, 약하고, 불편하며, 기피해야할 대상으로 치부될 때가 더 많다. 현대 사회는 ‘나이듦’을 더 이상 흠숭해야할 지혜의 보고(寶庫)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몇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나이가 든다는 것이, 즉 7~80년의 세월들을 통해서만 축적 가능한 사고와 경험, 그리고 지혜를 장착한 인간이 이상적인 생명체로 추앙받던 시절이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젊은이들이 한 살이라도 더 늙어 보이려고 구렛나루와 수염을 길렀고 이는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의 지혜’나 ‘노인의 말을 경청한다’는 표현은 이제 유교사회의 잔재로만 치부될 뿐, 노인은 더 이상 지혜에 오롯이 뿌리내리고 사유하는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 대신 현재를 작위적으로 해석하여 함부로 가르치려든다는 ‘꼰대’적 이미지로 쉽사리 등치될 뿐이다.
본 작업을 제안 받은 올 해 봄, 나는 설렜다. 동료들이 우리 사회의 소수자로 불리는 분들과 작업하면서 인간에 대한 해석을 섬세하게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고 울컥했다. 그러던 중 성북에 사는 노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곳의 도서관을 무대로 ‘나이듦’에 관한 작품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둠칫둠칫! 수직으로 치솟은 심박수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프로댄서들과 함께 하는 기존의 안무방식과는 달리, 100프로 아니 1000프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 놀라움과 즐거운 긴장으로 가득 찬 여름이 시작될 줄은 미처 몰랐다.
노인의 삶에 대하여 우리 사회가, 공동체가 바라보는 불문율 같은 시선이 있다. 노인의 삶은 늘 굴곡지고, 과거를 추억하고 살며, 어쩔 수 없이 외롭고 고독하다 등이다. 나 역시 비슷한 고정관념을 가졌기에 작품 준비과정은 이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노인들은 으레 복지관으로 간다고 생각하지만, 복지관이 아니라 도서관으로 향하는 노인들도 있다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복지관 보다는 도서관으로 출근해 서가를 정리하거나 책을 배달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동화구연을 하면서 인간으로서 지속해야할 성장의 흐름을 이어나가는 분들도 있다. 그들에게 도서관은 우리 사회가 남겨놓은 몇 안 되는 놀이터이자 한 인간의 나이듦을 맵시 나게 단장해주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한 ‘성북의 놀이터’를 지켜온 분들 중 하나가 바로 본 댄스필름의 주인공인 배금자 선생님이다.
작품에 관해 주변 지인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들도 나만큼이나 고정관념이 깊다는 것을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리서치를 하면서 깨달은 어르신들의 ‘현재’에 대한 뜨거운 진심, ‘나다움’만 오롯이 남은 또렷한 개성의 시기 등을 언급하면 주변에서는 내가 작품을 위해 어떤 특정한 노인의 모습을 상정해둔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작업이 진행될수록 명료해진 사실은 과거에 매달리는 습관은 아직 지난날에 대한 해석이 끝나지 않은 2~30대가 더 심하다는 것뿐, 많은 어르신들에게 과거란 이미 해석을 마친 일들에 대한 크고 작은 담소일 뿐이며, 현재에 대한 그분들의 집중력과 애착은 그 어느 세대보다 뜨겁다는 것이다. 더 이상 얼리어답터는 아닐지언정, 도서관에서 진행되는 핸드폰 강좌를 챙겨들으며 내일을 잘 살고자 알차게 집중하는 그분들의 모습이, 외국어 수업을 들으며 미래를 준비를 하는 학생들과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들이 쌓이면서 본 작품은 도서관이라는 조금은 특수한 공간에서 노인에 관한 고정관념에 몇몇 질문을 던지고자 하였다.
노인은 과거를 추억하며 사는가?
노인의 삶은 늘 굴곡진가?
노년은 외로운가?
작품은 노인 전체를 일반화하여 답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이는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또한 위의 질문들이 모든 노인에게 해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백이면 백 명이 각기 다른 취향을 바탕으로 가장 개성이 도드라진 세대가 바로 노인세대라고 하는데, 이들 중 한 명을 주인공으로 하여 도서관에서 ‘찬란하게 단장되는 나이듦’의 모습을 전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한 때 장발에 미니스커트를 착장하고 시대의 흐름을 꽉 차게 살아낸 후, 이제는 본인이 정말 좋아하는 옷, 음식, 취향, 흥미 등만 남은 초로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말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배금자 선생님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수어를 직접 배워 행사를 진행하면서 도서관과 오랫동안 호흡해온 성북 시민이다. 배금자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다른 할머니들처럼 머리를 새카맣게 염색하지 않았고, 첫 리서치를 시작하면서 입고 오신 청바지에 흰 티, 그리고 모자를 쓴 모습이 보기 좋아 댄스필름에서도 그대로 살리고자 하였다. 배금자 선생님은 1년에 30여권 정도의 책을 읽고,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옷을 잘 사지 않으며, 이제 막 노인의 시기로 진입하였다. 그의 주름, 옷매무새와 말투, 석 달 여의 리서치 동안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는 약속시간 등은 그가 삶을 대해온 태도와 그 안에서 만개한 ‘나다움의 개성’을 찬란하게 드러낸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습관, 모습 등이 다들 비슷해 보인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것은 그 세대에 관해 제대로 관찰해본 적이 없는 그대의 무지이며, 어르신들의 ‘개취’는 엇비슷한 트렌드와 획일적인 명품 취향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의 옷매무새보다 훨씬 더 각양각색! 찬란하고 다채롭다.
현대춤의 움직임적 대전제는 ‘모든 움직임은 춤이다‘라는 것이다. 말은 아름답지만 작품에서 구현하기는 쉽지 않은 이 문장을 이번처럼 곱씹으며 충실하게 따랐던 적도 드물다. 모든 춤의 요소는 배금자 선생님 안에 내재한 움직임과 리듬감을 끌어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춤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들수록 현대무용의 특징적 요소, 즉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추상적 움직임을 억지로 몸에 입혀드리는 방식을 지양하였다. 대신 선생님의 삶에서 쌓인 움직임의 습관을 알아갔고, 그리하여 배 선생님이 아이들을 위해 배워온 수어를 바탕으로 삶의 한 축이 되어준 도서관에서 따뜻한 춤을 길어 올리셨을 때, 나는 뭉클했다.
‘나이듦’이란 인간으로서 피해갈 수는 없지만 굳이 빨리 맞이하고자 환대해야할 무엇도 아니었기에, 나는 ‘나의 나이듦’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배금자 선생님이 젊은 나에게 보여준 나이듦은 가슴 벅차게 찬란하였고 추앙받아야 마땅한 것이었다. 삶의 치열한 선택들을 통해 몸이라는 인생의 도서관을 채워온 근육 마디마디마다 쌓인 아름다움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삶을 통해 충실하게 길어 올린 ‘나이듦의 몸단장‘을 나는 추앙한다.
‘노인을 공경해야한다’는 말인즉, 생명체로 태어나 성장하면서 전 인생에 걸쳐 축적된 유장한 아름다움을 우리 역시 같은 생명체로서 지지하고 소중히 바라보고자하는 태도인지 모른다. 7~80년여의 세월을 통해 정련된 ‘나다움의 존재적 찬란함’을 우리 역시 동일한 생명체로서 보다 섬세하게 포착하고 거기까지 이른 시간들을 예의를 갖춰 대하고자 하는 태도 말이다. 결국 ‘공경’이란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깊은 인격적 존중에 뿌리박고 있음을, 나는 깨닫는다. 때문에 10대와 20대의 시작을 설렘으로 끌어안았던 지난날처럼, 언젠가는 노인으로 불릴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이듦’을 찬란하게 끌어안을 용기가, 이 여름을 마무리하며 나에게 생겼다.
그대, 나이듦을 추앙할 수 있는가-.
*본 댄스필름 [나이듦을 추앙하는 몸단장]은 성북문화재단이 주최하고 이야기청이 주관하는 <노인의 이야기가 도서관이다>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성북구에 위치한 아리랑도서관 1층 로비에서 2022년 8월 23일(화)부터 9월 3일(토)까지 2주동안 상영될 예정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wthFJ6z8Gw
<노인의 이야기가 도서관이다>
🎞전체 일정:
✔ 아리랑도서관 2022.8.23.(화)-9.4(일)
*휴관 9.1(목)
*참여작가: 권석린, 천샘
✔ 성북정보도서관 2022.9.2.(금)-9.18(일)
*휴관9.5(월), 9.9(금)-9.12(월)
* 참여작가 : 김소진, 김찬우
▪관람 시간:
평일 오전10시-오후9시
주말 오전10시-오후5시
▪주최 : 성북구, 성북문화재단
▪주관 : 선잠52, 이야기청
▪기획 : 육끼, 정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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